어느 날 훌쩍, 갑자기

런던, 베를린, 리옹, 뉴욕으로 떠난 네 사람. 요즘 따라 마냥 더 부러운 이들의 작정이 있거나 없이 이 땅을 떠나 사는 법.

Art+Culture
어느 날 훌쩍, 갑자기
LYON, FRANCE
어느 날 훌쩍, 갑자기

Editor Ruby Kim

어느 날 훌쩍, 갑자기

나는 리옹에 산다. 파리와는 다른, 아기자기함이 느껴졌던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늦은 봄이었다. 시원하면서도 건조한, 서울과 다른 온도의 바람을 맞으면서 비로소 내가 새로운 곳에 있음을 실감했다. 사실, 한국을 떠나기 전부터 외국 생활에 환상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다른 언어와 문화, 이방인으로의 삶을 생각하면 그 반대였다. 그런데 리옹에는 왜 왔냐고? 이유는 간단하다. ‘좋아하는 것을 진정으로 좋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그런 곳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열망이 나를 이곳으로 무작정 데려왔다. 막연하게 품었던 생각을 구체화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외국에서 살아간다는 일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어쨋거나 나름대로 차근차근 준비를 했고, 마침내 리옹에 입성했다. 발길이 닿는 곳곳마다 낯선 언어와 사람들이 나를 반겼다. 정신없이 생활에 적응하기 무섭게 무더운 여름이 다가왔다. 처음으로 로맨틱하게만 들리던 프랑스어의 장벽에도 부딪혔다. 프랑스어로 ‘보고 싶다’는 말을 한다는 게 직역으로 해석하면서 ‘너는 나에게 부족하다’로 잘못 말하기도 하고(그러나 보고 싶다는 말보다 더 로맨틱하게 느껴진다), 성별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달라지는 수많은 명사와 동사에 녹다운 되는 것 같았다. 아름답지만, 아름답게 말하기까지는 쉽지 않은 언어라는 것을 느꼈다. 언어만큼이나 생소한 이곳의 문화도 문제였다. 초고속 인터넷과 신속한 일 처리를 당연한 일상이라 생각하며 살았던 서울에서의 생활과는 정반대였다. 이곳에서는 어떤 일을 마무리할 때 그에 따르는 행정 처리 기간이 기본 1주일 이상은 잡아야 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기다려야 하는 일이 부지기수. 프랑스에서 은행 계좌를 여는 데 무려 한 달 반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서울에서라면 단 5분이면 될 일들인데…. 웃지 못할 일들의 연속이었지만, 이런 문화 때문에 새로운 습관도 생겼다. 모든 영수증과 편지를 모으게 된 것. 한국과는 다르게 중요한 일들은 대부분 서류로 주고받는 편이기 때문에, 함부로 버렸다가는 모자란 서류 때문에 행정 처리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매일 불편한 일들이 생기긴 했지만, 사진가의 꿈을 가진 나에게는 이곳만큼 좋은 도시는 없었다. 가장 놀라운 부분은 매일 벌어지는 축제. 하루가 멀다 하고 미술, 영화, 음악, 연극, 음식 등 많은 축제가 열린다. 아마 1년 내내 축제가 끊이지 않는 도시가 리옹일 것이다. 봄에서 여름, 가을,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마다 새로운 축제들이 날 기다렸다. 특히 시청 옆에서 케이팝을 사랑하는 리옹의 젊은이들이 연 케이팝 댄스 대회를 봤을 때는, 한국인으로서 반갑기도, 놀랍기도, 묘하기도 했다. 비로소 내가 이곳에 오려고 했던 이유가 떠올랐다. 유학이 절대 답이 아닌 것도, 성공의 길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떠나와서일까 힘이 들어도 하루 하루가 즐겁다. 매일 여행하는 기분으로 지내는 기분이다. 그러나 지금도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내 저울질은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나의 선택이 맞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끝이 없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무더운 여름도 무사히 지나가고 어느덧 이곳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얼마 전 첫눈이 내렸다. 같이 공부하는 남미 친구들은 난생처음 눈이 내리는 것을 본다며 신기해했다. 문득 언젠가 시간이 흐르면 분명히 오늘을 그리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Text & Photography 최하나(유학생)

어느 날 훌쩍, 갑자기
NEW YORK, USA

2009년 7월 19일, 나는 뉴욕에 왔다. 7년간 몸담았던 매거진 <코스모폴리탄> 패션 에디터 생활을 뒤로하고, 과감히 6개월간의 긴 휴가를 택한 것이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로 꿀같이 여유로운 시간들이 나에게 처음으로 주어졌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일종의 방학 같았다고 해야 할까. 뉴욕에 도착한 날부터 다운타운에서 업타운까지 맨하튼 구석구석 두발로 걸어 다니며 여행자로서 즐길 수 있는 자유를 원없이 만끽했다. 하지만, 언제나 좋은 시간은 쏜살같이 흐른다. 어느덧 정해놓은 데드라인이 다가왔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할 일을 생각하니 아쉬움과 답답함이 몰려왔다. 인생에서 다시는 이런 자유를 갖지 못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 아쉬움을 뒤로한 채 서울로 돌아가는 것이 내 인생에서 맞는 선택일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결국 1년 더 뉴욕에 머물기로 결심했다. 마음을 굳히자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이미 6개월간의 체류비로 모아놓은 돈을 다 썼기 때문에, 지금부터의 생활은 현지에서 벌어서 유지해야 했다. 여행자에서 생활인이 되면서 책임감 있게 계획을 세워야 했다. 훗날 서울에 돌아가더라도 내가 다시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는 일들을 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고민도 들었다. 하지만 옛말에 궁하면 통한다 했던가. 서울에 있는 지인들이 나에게 뉴욕에서 할 수 있는 프리랜서 에디터, 마케팅 리서치 등의 소소한 일거리를 부탁했고, 나는 과감히 뉴욕에서 일을 할 수 있는 비자를 신청했다. ‘그래, 나에게 1년의 시간을 더 주자. 세상을 둘러보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조금만 더 주어보자’라는 것이 그때의 결심이었던 같다. 정신없이 뉴욕에 적응하다 보니 시간은 참 빠르게 흘렀고, 내게 허락했던 1년간의 시간은 어느덧 3년이 되었다.
그사이 나는 자연스레 뉴욕 생활에 젖었고, 몰랐던 문화와 생활 방식을 알아나갔는데, 그것을 배우고 해내는 과정에서의 성취감이 굉장한 행복을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패션 디자이너, 인테리어 디자이너, 포토그래퍼, 모델 등 뉴욕에 사는 다양한 아티스트들을 인터뷰할 기회가 참 많았는데, 나는 그들을 통해 뉴욕이란 도시가 왜 나를 이렇게 붙잡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전 세계에서 온 다재다능한 사람들로 가득 찬 도시이기에 내가 나를 보여줄 기회를 만들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봐주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성실하게 일하는 내 모습과 동시에 열정적으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어필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사람들이 내가 손을 흔들 때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계속 끊임없이 하던 일을 이어가는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도.
2016년 11월, 나는 이제 7년 차 뉴요커다. 뉴욕을 베이스로 하는 프로듀서로 자리를 잡았고, 뉴욕뿐 아니라 LA, 런던 등 주요 패션 도시에서 진행되는 패션 광고와 잡지 화보를 제작하기 위해 모델을 캐스팅하고 포토와 헤어, 메이크업 등 아티스트를 섭외한다. 지금도 하루하루가 도전의 연속이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통로를 지나가고 있는 느낌이 들 때가 간혹 있다. 내가 무엇을 위해 가족의 품을 떠나 홀로 이 시간을 보내는 건가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땐 난 7년 전 이곳에 처음 왔을 당시를 되돌려본다. 그사이 참 많은 성장과 변화가 있었고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기에 지금이 있다는 믿음. 그리고 지금 이 시간이 앞으로 내게 펼쳐질 시간들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지를 전적으로 알기에 나를 다독이고 응원한다. 참 신기하다. 늘 고민했던 답이 풀린 느낌이라고 할까. 이 글을 쓰면서 처음 뉴욕에 온 시간부터 지금까지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내가 왜 아직까지 뉴욕에 있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알게 된 것 같다. 그래, 나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아직 다하지 못한 숙제,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나를 붙들고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로 내가 만족한다 싶은 때가 분명 몇 년 뒤에 올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난 과감하게 또 다른 여행을 하고 싶다. Text & Photography 박인영(패션 프로듀서)

어느 날 훌쩍, 갑자기
BERLIN, GERMANY

졸리면 자고 눈이 떠지면 일어나기. 근처 마트를 가거나 집 앞 공원을 산책하기. 베를린에 도착해 얼마간은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지냈다. 카메라는 꺼내지도 않았다. 내일도 모레도 해야 할 일이 없는 것이 제일 좋았다. 보디로션을 꼼꼼히 바르며 몸 어디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살핀다거나 하루도 빠짐없이 비타민을 챙겨 먹고 좋아하는 것들의 근황을 찾아보기도 하는 평온한 일상을 살고 싶었다. 이런 건 굳이 베를린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인데 왜 서울에선 어려웠을까. 새로 산 이불 커버를 세탁하고 다림질까지 해 씌우면서 이런 것들을 차근차근 할 수 있는 생활이 얼마나 필요했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 무렵까지의 베를린은 집 근처 반경 1km 정도를 벗어나지 않았고 겪은 것이라곤 커다란 나무로 둘러싸인 공원, 비현실적으로 선명한 구름, 낯선 식료품이 가득한 마트가 전부였다. 그 테두리를 벗어난 첫 외출이라고 할 만한 기억은 페차쿠차가 열린 갤러리에 갔던 것인데, 프레젠테이션도 좋았지만 공간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유모차를 탄 아기와 함께 온 커플부터 두꺼운 안경을 쓴 할머니, 누군가와 함께 온 골든리트리버까지, 꼭 누구라서가 아닌 누구든지 있는 풍경이 좋았다. 그 후로 찾은 공연장이나 카페, 식당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멋있는 공간 안을 채우고 있는 아무나인 사람들의 풍경이 멋있었다.
생활 방식을 말하자면 베를린은 불편한 점투성이다. 인터넷은 느리고 와이파이가 없는 카페가 수두룩하며, 전화가 안 터지는 지하철과 건물은 이상한 게 아니고, 은행 계좌를 만들려면 예약을 잡고 며칠을 더 기다려야 한다. 계좌를 만들고 나면 일주일이 지난 후에야 비밀번호가 적힌 레터를 받을 수 있고, 상점들의 보편적인 마감 시간은 저녁 8시, 그마저도 일요일에는 대부분 문을 닫는다. 하지만 일요일이면 곳곳에서 플리 마켓이 열리고, 금요일에 시작해 월요일 아침까지 쉬지 않고 춤을 출 수 있는 클럽이 있으며, 주말이면 24시간 운행하는 대중교통이 있는 이상한 도시이기도 하다. 막상 초고속 인터넷이 필요한 상황은 많지 않고 필요한 물건은 미리 사두면 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노동자가 쉴 수 있는 일요일이, 이 불편함이 싫지도 않다.
낯선 풍경과 사람들도 이제는 익숙해졌고,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도 잊고 지낸다. 그러다 문득 타지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는데, 이 아무렇지 않은 생활이 새삼스레 더 고마운 것은 오는 데까지의 시간이 너무 고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다 정말 비행기 못 타면 어떡하지? 나는 출국 전날까지도 마감을 하고 있었다. 여름옷 몇 벌과 카메라, 필름, 상비약, 노트북, 당장 필요한 짐을 꾸려 공항버스에 앉으니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고서야 아주 조금 실감이 났는데, 이상하다 싶을 만큼 실감이 안 났던 것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국까지의 과정을 떠올려보면 결심한 지 한 달 만에 오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 같지만, 베를린에 오려고 마음먹은 것은 7년 전. 이유도 희미할 만큼 오래전의 일이다. “내년엔 진짜 갈 거야.” 입버릇처럼 말하고 그다음 해가 되면 또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언젠가 꼭 갈 것이라는 마음과 결국은 못 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뒤섞여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펼쳐보니 엉망으로 자란 손톱, 그보다 더 엉망인 집, 마감이 끝나면 또 다른 마감, 출근은 하지 않지만 퇴근도 없는 날들에 흩어져버린 생활이 드러날 때마다 떠올리는 막연한 장래 희망 같은 것. 요즘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이메일을 쓴다. 시차를 고려해 적당한 시간을 기다려 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지만 별 쓸모없는 말들을 모아 두서없는 안부를 묻고 답장이 오길 기다리는 기분도 좋다. 바로 곁에 연결되어 있지 않은 그 거리감이 서운하기보다는 편안한 기분. 이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끝날 거리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언젠가는 이곳을 그리워하며 살게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는데, 아직 겪지도 않은 그 순간을 상상하기만 해도 벌써 그렇다. Text & Photography 송곳(사진가)

어느 날 훌쩍, 갑자기
LONDON, UNITED KINGDOM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이며 나에겐 세상 어느 곳보다 편안하게 느껴지는 런던. 와본 적도 없고 친지가 있는 곳도 아닌 이곳에 오도록 결심하게 만든 것은 런던에서 몇 달을 보냈던 친한 친구의 말이었다. “네가 완전 좋아할 곳이야.” 나를 속속들이 알고 있던 친구의 그 한마디는 순식간에 나를 사로잡았고, 젊은 날의 객기는 혈혈단신으로 비행기를 타게 만들었다. 당시 내가 영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남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비, 여왕, 맛없는 음식, 빨간 공중전화 부스와 2층 버스의 나라. 런던에 도착한 첫날은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장기간 있을 집을 구할 때까지 잠깐 머물기로 한 홈스테이에는 나 말고도 세계 각지에서 온 여러 명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짐을 풀 새도 없이 그들의 손에 이끌려 동네 펍에 갔다. 긴 비행에 목이 말랐던 나는 물 한 잔 달라는 말을 했는데, 나의 말을 바텐더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Can I have some water please?” “You want what?” ‘워러’라는 내 억양을 좀처럼 알아듣지 못하는 그의 반응에 당황한 내 머릿속에 영국에서는 T 발음을 한다는 사실이 스쳐지나갔고, ‘워터’라고 쭈뼛쭈뼛 발음하자 그제서야 “Oh, water!” 하며 물을 주던 바텐더. 그렇게 시작된 내 런던 생활은 끝없는 고생과 배움의 연속이었다. 지하철 방송은 영어가 아닌 독일어같이 들렸고, 우리나라와 다른 시스템에 모든 것이 어렵고 느리게 느껴졌다. 그나마 활달한 성격 덕분에 친구가 금세 늘면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를 배우고 언어에 적응해나가자 생활은 점차 편해졌고 머릿속에 자리하던 선입견은 하나 둘 깨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니 런던의 좋은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도시와 사랑에 빠진 데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 가장 큰 것은 바로 자유가 아닐까 싶다. 나에게 있어 자유는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억압과 통제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그것들을 싫어해 권위적인 틀을 못 견뎌했고 긴 다툼 끝에 고등학교를 관두기도 했다. 서울에서의 삶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어 즐거운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내가 나로서 살 수 있는 것, 강한 전통과 유교적 정서가 지배하고 있는 보수적인 우리 사회에서 개성을 가지고 살아가려면 때때로 손가락질을 감수해야 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말처럼. 그런 점에서 런던에서의 새로운 삶은 고달팠지만 동시에 많은 것들을 허락했다. 수평적인 사회에서 윗사람이나 상사와도 격의 없이 대할 수 있는 점은 일종의 컬처 쇼크였다. 백발의 할아버지 이름을 부르며 같이 맥주를 마신다든가, 강의실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교수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도 흔한 풍경이었다. 남의 시선을 크게 의식할 필요성도 못 느끼고,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할 수 있는 것도 좋았다. 나이 한두 살 많다고 윗사람 대접받으려 하는 이도 없으며, 무엇보다 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숨길 필요가 없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자 행복이 아닐까 싶다. 게이로 서울에서 살아가는 것은 많은 비밀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커밍아웃을 했을 때 받는 불이익과 손가락질은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을 움츠리게 했고, 옷장 속에 숨게 만들었다. 가족과 친구들이 모르는 이중생활을 하며 그 간극에서 오는 괴리는 견디기 힘들었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런던은 나에게 그런 삶을 요구하지 않았다. 학교나 직장에서 내 정체성을 숨길 필요가 없는 것만으로도 나의 삶은 더욱 당당해졌다. 차별이 법적 처벌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인 인식의 차이로 차별당한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굳이 내 정체성에 대해 말을 안 하는 대상은 일부 한국인 정도였다.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법정책연구회가 펴낸 연간 보고서 <한국의 LGBTI 인권현황 2013>을 보면 성소수자 평등지수에서 영국은 77%를 기록, 66%의 노르웨이와 60%의 덴마크조차 앞서고 있다. 한국은 15%로 일본의 절반 수준이다. 인생의 반쪽을 만나 결혼을 한 뒤로는 이런 점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사랑하는 사람을 평생 숨기고 살 자신이 없어 결혼을 계기로 한국의 부모님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1년의 시간이 흐른 뒤, 결국은 이해하고 응원해주셨지만 결혼 사실을 친척들이나 지인들에게는 말하지 못한다는 말씀은 우리 사회의 벽이 높다는 것을 되새기게 했다. 때문에 할머니께 가끔 안부 전화를 드리면 아직도 “이제 장가가야지”라는 말을 듣는다. “할머니, 저 사실 결혼한 지 5년 됐어요”라는 말은 입에서 공허하게 맴돌 뿐이다. 내 모국인 한국에서 나와 내 배우자의 관계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슬픈 현실이다. 미국인 배우자에게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줄 수 없음은 물론, 학교나 직장에서 배우자의 존재를 떳떳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잠시 입원을 하게 되었을 때 느꼈던 차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이곳에선 근친자(Next of Kin)를 묻는 병원 측의 서류에 같은 남자인 그를 배우자로 적어도 이상한 것이 아니었으며, 나에게 무슨 일이 있을 경우 그에겐 법적 동반자로서의 모든 액세스와 권리가 보장되었다. 병원 스태프들 누구도 우리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음은 말할 것도 없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내 조국에서는 아직 너무나 먼 훗날의 이야기일 뿐이다. 피부색과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런던이 나에게 허락한 것은 비단 성 정체성의 해방뿐만은 아니다. 이해되지 않았던 많은 문화적 충격들이 하나 둘 해소되면서 런던은 단지 비가 많이 오는 우중충한 회색 도시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다양성이 존중되고, 많은 다른 문화와 전통을 접하고 살아갈 수 있는 배움의 장이며, 개인이 자신의 생각을 스스럼없이 개진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또한 수많은 스타 셰프의 나라이며 음식이 형편없다는 것은 선무당 블로거들의 글을 본 여행자들의 잘못된 편견이라는 중요한 사실도 알았다! 물론, 이곳엔 없는 소소한 삶의 즐거움이 그리울 때도 많다. 친구들과 PC방에 가서 게임도 하고 싶고, 새벽 2시에 동네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고도 싶고, 가을이면 산에 올라 단풍을 구경하고 싶어진다. 제대로 된 한국 음식이 그리운 것은 물론이다. 글을 쓰다 보니 문득 한국이 그리워져, 내일은 남편과 가끔 가는 한국 주점에서 골뱅이무침을 놓고 소주 한잔할 생각이다. 한 병에 2만원이 넘는다는 것이 함정이지만, 비행기표보다는 싸니까 그것에 위안을 삼으며.
Text & Photography 서유석(자유기고가, 스트리트 푸드 오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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