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미술관과 완벽한 연인들

떠나는 미술관을 앞에 두고 한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상실과 사랑, 죽음, 그리고 부드럽고 우아하게 애도하는 방법을 알았던 남자,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를 기억하며.

Art+Culture
떠나는 미술관과 완벽한 연인들

Text Ji Woong Choi

떠나는 미술관과 완벽한 연인들

올봄 만난 미술가인 친구 놈은 격앙된 태도로 서울의 플라토 미술관이 여름 ‘리우 웨이’의 전시를 마지막으로 폐관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진지하게 들어주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뭐 어쩌라는 건지’ 하는 생각만 들었다. 어차피 국내의 젊고 가난한 작가들에게 곁을 내어주는 미술관도 아니었으니 너나 나나 그 미술관의 혜택을 볼 일은 없다.

다만 로댕갤러리 시절부터 플라토 미술관으로 간판을 바꿔 단 후 그곳을 지나간 전시들을 경쟁이라도 하듯 하나 둘 꺼내 보기는 했다. 백남준과 구본창, 이불, 오노 요코, 장영혜중공업, 박이소, 김아타, 무라카미 다카시와 로댕을 비롯한 슈퍼스타의 이름이 중구난방으로 튀어 올랐다. 유명한 이름들이 카페의 공기 속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흩어져갈 무렵 애틋하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조금 불편한 이름이 있었으니 바로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Félix González-Torres)다. 2012년의 여름이 유난히 선명하게 남아 있을 리 없다. 그해 장마가 길었는지 태풍이 몇 개나 지났는지 기억해서 뭐 하나. 그런데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의 전시가 열린 서울의 풍경은 오늘처럼 선명하다.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는 에이즈 위기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가다. 그는 게이였다. 1957년 쿠바 과이마로에서 태어났지만, 스페인을 거쳐 푸에르토리코에서 성장했다. 1979년 22세의 나이로 미국 뉴욕으로 유학을 떠났고, 몇 년 후 영원한 연인 로스 레이콕을 처음 만났다. 다시 몇 년이 지나 둘은 가정을 이룬다.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는 작품을 만들 때 염두에 두는 가장 중요한 관객으로 연인 로스를 꼽았다. 개념 미술의 어법을 사용하여, 드러내는 법이 없었지만 사실 그의 작업 전부는 유일한 연인 로스에 관한 개인적인 추억을 다룬다.

‘무제(완벽한 연인들)’는 한 쌍의 동일한 원형 시계를 설치한 작품이다. 동시에 배터리를 넣고 같은 시각으로 맞춘 시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기계적인 차이로 어긋나기 시작하고, 결국 하나의 시계는 먼저 멈추어 죽게 된다.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와 연인 로스 레이콕이 함께한 8년 동안 로스는 대부분의 시간을 에이즈로 투병했다. 그러니 이 연인에게 일분일초의 시간은 얼마나 아깝고 귀중했을까.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는 한 쌍의 시계로 담담하게 삶과 사랑, 죽음을 담아낸다.

‘플라세보’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실제적인 효능 없이 환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처방되는 가짜 약. ‘무제(플라세보)’는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의 기념비적인 사탕 작품이다. 미술관 바닥에 깔린 500kg에 육박하는 사탕은 에이즈 발병 초기 동성애자를 중심으로 질병이 확산되자 상황을 외면한 대중의 침묵과, 이미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이후에 시작된 미국 정부의 뒤늦은 임상 실험을 언급한다. 바닥에 깔린 사탕은 관람객이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다. 줄어드는 사탕은 죽음과 소멸을 의미할 텐데, 우리는 쉽게 죽을 수 없다. 사탕은 매일 같은 무게로 다시 채워진다. 영원한 삶과 사랑이 가능하기를 바라서다. 하지만 플라세보의 효과는 거기까지였고,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는 연인 로스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연인을 떠나보내고 5년이 지난 1996년, 연인과 같은 병에 걸려 죽는다. 아직 불혹의 문턱이었다.

에이즈는 더 이상 더러운 불치병이 아니다. 당뇨처럼 조금 귀찮고 성가신 병일 뿐이다.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가 죽어버린 그해 칵테일 요법이 보급되면서 그렇게 되었다. 달콤한 칵테일을 마신 그가 죽어버리지 않았다면, 같은 부질없는 상상을 해보다가 말았다.

2012년 여름 플라토 미술관에서 열린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의 전시 <Double>은 아시아 최초의 미술관 전시였다. 서울 곳곳의 전광판에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의 작업이 걸려 있었다. 함께 지낸 흔적만 남은 침대 사진의 제목은 역시 ‘무제’인데, 알 놈은 알고 모를 놈은 몰랐지만 에이즈로 죽은 게이 미술가의 작업이 마치 공공 미술의 형태로 우리 곁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 길을 지날 때마다 위안인지 쾌감인지 모를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동성애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이 당연하던 그 여름,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의 전시로 어쩌면 많은 것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순진한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늘, 떠나는 미술관 덕분에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를 기억하며 좌절과 푸념 대신 완벽한 삶과 사랑을 쟁취하여 악착같이 살아내겠다는 단단한 마음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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