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wakubo Rei

레이 가와쿠보. 감히, 그 위대함에 대하여.

Kawakubo Rei

Text Jong Hyun Lee

Kawakubo Rei

“디자이너가 돼, 그리고 경영자가 돼. 그러면 아무도 너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못할 거야.” 레이 가와쿠보는
자신의 제자 아베 치토세(사카이의 디자이너)를 떠나보내며 이 말 한마디를 던졌을 뿐이다.

프랑스어로 ‘소년과 같은’이라는 뜻을 지닌 패션 브랜드 ‘COMME des GARÇONS’의 창립자인 그녀는 지금 자신의 말대로 디자이너자 경영자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는다.

“옷을 디자인하는 것뿐 아니라 회사 전체를 디자인한다”고 말하는 그녀는 1969년 여성복을 기반으로 한 브랜드를 설립한 후 COMME des GARÇONS HOMME(다양한 연령대의 남성을 상대로 전개하는 남성복 라인, 1978), tricot COMME des GARÇONS(니트웨어 브랜드, 1981), COMME des GARÇONS HOMME PLUS(실험적인 성향이 짙은 남성복 라인, 1984), COMME des GARÇONS HOMME DEUX(비즈니스맨을 위한 슈트 라인, 1987), COMME des GARÇONS SHIRT(셔츠를 중점적으로 전개하는 라인, 1988), Junya Watanabe COMME des GARÇONS & MAN(준야 와타나베가 선보이는 여성복과 남성복 라인, 1992·2001), COMME des GARÇONS Parfums(향수 라인, 1994), PLAY COMME des GARÇONS(그래픽 아티스트 필립 파고우스키와 협업한 하트 로고를 사용해 베이식한 아이템을 유일하게 대량 생산해 판매하는 라인, 2002), GANRYU COMME des GARÇONS(후미타 간류가 선보이는 스트리트 스타일의 라인, 2007), BLACK COMME des GARÇONS(무채색 컬러의 아이템을 합리적인 가격대로 선보이는 라인, 2008), The Beatles COMME des GARÇONS(비틀스에 대한 찬사 디자인에 반영하는 라인, 2009), Noir by Kei Ninomiya(케이 미노미야의 개별 라인으로 가장 최근에 론칭, 2013) 등 지속적으로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어내며 그저 자금력으로 몸집을 불리는 방식이 아닌 디자인과 제품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독특한 방식으로 패션 왕국을 ‘디자인’했다.

알다시피 그녀는 1981 F/W 시즌 파리 패션 위크 데뷔 이래 단번에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 동료이자 한때 연인이었던 요지 야마모토와 유럽 시장에서 보여준 전례없는 안티 패션과 최초의 해체주의 패션은 ‘히로시마
시크’라는 역사적인 집단으로 불리며 1980년대의 패션신의 주인공으로서 무대를 휩쓸었다.

20세기 후반에 얻은 명성을 그녀는 스스로가 독점하기보다 후배들을 위해 사용했다. 일본 스트리트 신의 중심에 있던 준 다카하시(언더커버의 디자이너)가 그녀의 후원 아래 파리 무대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으며, 준야 와타나베와 쿠리하라 타오(2005년부터 2011년까지 자신의 이름을 딴 Tao 라인의 디자이너로
활동), 후미타 간류와 같은 재능 있는 하우스 소속 디자이너는 자율성을 지닌 자신의 레이블을 통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꼼데가르송의 니트웨어 디자이너였던 아베 치토세가 브랜드 산하의 새로운 라인이 아닌 독립적인 브랜드를 론칭했을 때도 그녀의 첫 캡슐 컬렉션 ‘Sacai Gem’을 꼼데가르송의 매장은 물론 본인의 편집 숍 도버 스트리트 마켓에서 소개함으로써 그녀의 출가를 도왔다. 최근에는 고샤 루브친스키의 초기 컬렉션을 도버 스트리트 마켓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지금의 고샤 루브친스키가 존재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1942년생의 레이 가와쿠보 여사는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지금까지 신인 디자이너를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자신의 전부를 거는 패션 위크에서 입이 떡 벌이지는 전위적인 의복을 그 어떤 배경 음악도 없이 달랑 20벌 정도를 선보이며 1980년대에 선보였던 방식과 다름없는 창의성과 창조력을 매 시즌 쏟아붓고 있다. 패션업계에서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신이 하고 싶은 방식을 고수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새롭게 선보이는 라인을 무리하게 본인이 이끌어가기보다는 재능 있는 직원에게 위임하고, 디자인과 경영 모두를 병행하기 힘들다고 느낀 순간에 하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 가와쿠보의 남편, 아드리안 조프(Adrian Joffe)는 현재 꼼데가르송과 도버 스트리트 마켓의 사장이자
CEO로서 경영에 대한 모든 것을 총괄한다. 그는 1987년 커머셜 디렉터로 꼼데가르송과 인연을 맺었고,
1993년 레이 가와쿠보와 결혼하며 사장이 되었다. 1994년, 사장에 임명된 이듬해 그는 스페인의 뷰티 그룹 푸이그(Puig)와 ‘부분 라이선스’ 계약을 하고 향수 라인을 론칭했다. 푸이그 그룹에게 독단적인 라이선스를
내어주는 것을 거부한 그는 COMME des GARÇONS Parfums과 COMME des GARÇONS Parfums Parfums이라는 두 개의 회사를 설립했다. 전자의 라이선스를 푸이그에게 넘기는 대신 후자의 브랜드로는 자체적으로 꼼데가르송의 향수를 판매할 수 있게 만들었고, 이는 현재 연간 약 115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핵심 산업이 되었다.

또 꼼데가르송의 제품을 모두가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그는 꼼데가르송을 사랑하는 고객들을 위해
창고에 쌓여 있던 재고를 판매하는 작은 팝업 스토어를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전 세계 37개 매장에 열었으며, 2008년에 선보인 H&M과의 콜라보레이션을 레이 가와쿠보에게 먼저 제안했다. 그리고 2004년 런던에서 첫선을 보인 편집 숍 도버 스트리트 마켓은 꼼데가르송 라인과 고가의 럭셔리 아이템부터 저렴한 티셔츠에 이르기까지(이 마케팅의 일환으로 고샤 루브친스키도 소개될 수 있었다) 다양한 품목과 가격대의 제품을 판매했다. 로즈 베이커리(Rose Bakery)라는 카페를 함께 오픈해 많은 고객들이 더 쉽게 꼼데가르송에 접근할 수 있는 마케팅을 펼쳤고, 이제 10년을 넘긴 도버 스트리트 마켓은 꼼데가르송의 고객들이 사랑하는 또
다른 ‘라인’이 되었다.

몇 년 전 읽은 <지미추 스토리>는 패션 산업에 종사하고자 하는 나 개인을 한없이 초라하고 보잘것없이 만들었다. 수천억원대의 거대 자본이 움직이고 그 자본에 의해 존망이 결정된다는 책의 내용은 그동안 외면했던 패션의 산업성과 상업성에 대한 입장을 180도 바꾸었고, 패션의 순수성을 믿었던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게 했다. 우리는 패션이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수십년간 이어온 레이 가와쿠보의 성취는 절대 그녀의 디자인적 창의성과 비범함, 반골 정신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녀가 여전히 순수한 작업물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연간 115억원을 벌어다주는 향수 라인과 연 3000억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브랜드에서 무려 약 10%를 담당하는 PLAY 라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관리하는 남편이자 CEO 아드리안 조프가 있음을 잊어서도 안 된다. 현대 패션에서 디자이너가 스스로의 독립성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본으로부터의 자유다. 레이 가와쿠보 여사가 아베 치토세를 떠나보내며 디자이너이자 경영자가 되라고 한 조언은 자신의 제자가 독립성을 지키길 바라는 그녀의 진심을 돌려 말한 것은 아니었을까? 레이 가와쿠보가 위대한 이유는 바로 반골 정신을 외치면서도 상업성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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