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소비의 시대라고?

나는 오늘도 돈이 없지만 돈을 쓴다. 그런데 이유가 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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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소비의 시대라고?

Text Ruby Kim

가치 소비의 시대라고?

“우리 사회가 스스로를 말하는 방식, 그것이 소비다.” -장 보드리야르

얼마 전 연말 정산을 하면서 다시 한 번 느꼈다. 정말 돈을 많이 쓰는구나. 버는 족족 쓰는구나. 아니, 정확히는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이 많구나. 그날 저녁 퇴근길 한남대교를 건너는 버스의 라디오에서 아나운서가 낭창한 목소리로 저녁 뉴스 리포트를 읊었다. “금융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부자들의 월평균 소득은 2300만원으로, 월평균 1000만원의 소비 지출을 하는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이어 이들 부자가 우리나라 총인구의 몇 퍼센트라 한 것 같은데 정확한 멘트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1000단위를 넘어가면 0의 개수를 하나, 둘, 셋… 어리바리하게 세기 일쑤인 나에게 월 1000만원이라는 거액의 지출 금액만 강렬하게 각인됐을 뿐. 누가 뒷자리에서 빈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돈 많은 사람 참 많아.”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화장지가 떨어진 게 생각나 마트에 들렀다. 종류도 천차만별인 거대한 화장지 무덤 앞에 서서 9800원짜리와 1만600원짜리를 놓고 길이와 개수를 비교하다가, 국정 농단의 주인공 최모 씨가 자택 두루마리 화장지에 지폐를 말아놓고 썼다는 가십이 퍼뜩 떠올랐다. 9800원짜리 화장지 묶음을 들어올리는데 괜스레 팔에 힘이 빠졌다. 이 화장지가 다 돈다발이었으면. 카트를 끌고 계산대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다 마트 풍경을 이리저리 살폈다. 재미있게도 카트에 담긴 물건들에서 그 사람의 가족 구성원, 소득 수준, 취향까지 다양한 정보가 보인다. 일찌감치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는 소비를 하나의 신화로 봤다. 그는 저서 <소비의 사회>를 통해 “소비란 현대사회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 우리 사회가 스스로를 말하는 방식, 그것이 소비”라 역설했다. 덧붙여 과거에는 계급의 기준에 ‘권력’만 있었다면, 현재의 계급에는 ‘기호와 취향’의 차이가 중심에 있고 그 기준으로 사회가 돌아가고 소비가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사회가 소비하는 것은 상품이 아니라 기호라는 것. 1970년대 프랑스 사회를 조명한 이 이론은 2017년 한국의 현실과 놀랍도록 맞닿아 있다. 바야흐로 ‘트렌드를 좇는 몰개성 소비의 시대’는 가고, 개개인의 개성과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기호와 가치 소비의 시대’가 왔다. 이제 더 이상 소득과 소비는 비례하지 않게 됐다. 요즘 주목할 만한 사회 현상으로 대두되고 있는 ‘욜로(Yolo)족’을 예로 들어보자. 이들은 내 집 마련, 노후 준비 같은 장기적인 계획보다는 지금 당장의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는 취미 생활이나 자기 계발 등에 돈을 아낌없이 쓴다. 예를 들면 전 재산을 털어 세계 여행을 떠난다든지, 취미 생활에 목돈을 소비하는 식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들의 소비가 단순히 물욕을 채우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이상과 자아를 실현하는 데 목표를 둔다는 점에서 충동 구매나 과소비와는 구별된다. 그러고 보니 재작년 여행을 앞두고 고민하는 나에게 친구의 말 한마디가 결정에 큰 역할을 했다. “시간은 돈을 주고 살 수 없잖아.” 팔이 빠져라 무거운 화장지 다발을 억척스럽게 이고 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아까 생각했던 것처럼 이 화장지 묶음이 돈다발이라면 무엇을 하고 싶을지. 당장 뭔가 갖고 싶은 물건이 떠오르기보단 글쎄, 사계절 따뜻한 남쪽 휴양 도시 어딘가로 이민이나 갈까 한다. 자,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떤가.

YOLO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 거야.
욜로(YOLO). ‘인생은 한 번뿐이다’라는 뜻으로 ‘You Only Live Once’의 머리글자를 딴 신조어다. 남을 위해, 혹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미래를 위해 희생하지 않고 현재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고 소비하는
태도를 말한다. 솔직히 일반 월급쟁이 연봉으로는 평생을 저축해도 집 한 칸 마련하기 녹록지 않은 게 현실. 이른바 디플레이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미래보다 현재, 순간에 충실하자는 움직임이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참고 저축하며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하고 살던 사람들이 순간과 현재의 행복을 좇는 소비에 나섰다. 단, 의미를 혼동하지 말 것. ‘오늘만 산다’가
아니다. ‘오늘을 산다’는 뜻이다.

시발 비용 이 정도 누릴 권리는 있어.
시발 비용이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쓰지 않았을 기회비용을 말하는 인터넷 신조어다. 비속어 ‘X발’과 ‘비용’을 합쳐 만든 말이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입에 착착 붙는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같은 SNS를 통해 급속도로 퍼지면서 폭발적인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예를 들면 홧김에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산다거나, 평소라면 대중교통을 이용했을 거리도 짜증을 핑계로 택시를 타는 행동을
뜻한다.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이 정도도 못 누리나?’ 하는 자기 합리화, 욱하는 마음에 계획에 없던 소비를 하는 것. 비슷한 말로 ‘탕진잼’이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탕진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
금액은 작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누적 금액에 진짜 가산을 탕진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B+프리미엄 품질이 좋다면 이름값은 안 따져.
물건을 살 때 인터넷 검색만으로 최저가를 포함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때문에 실속을 추구하고 합리적인 소비를 즐기는 똑똑한 소비자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가격 대비 성능, 가성비를 따지지만
무조건 싼 가격보다는 객관적으로 탁월한 품질이 따라올 때 지갑을 연다. “과시적 소비는 끝났다”고 이야기한 월마트 영국 대표 앤디 본(Andy Bond)의 말처럼, 이제 옷을 입을 때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럭셔리
브랜드(그 말 자체도 촌스럽고)로 치장하는 것은 (더) 촌스럽고, 유니클로 같은 저가 제품과 고가의 명품을 섞는 것을 쿨하게 생각하는 시대다. 얼마 전 루이 비통과 슈프림의 콜라보레이션으로 들끓은 패션계
이슈도 같은 맥락. 덕분에 그동안 럭셔리는 럭셔리끼리, 중저가는 중저가끼리의 경쟁 구도도 점차 허물어지고 있다. 소비자로서는 그저 기쁠 따름!

경험해봤니? 어찌 됐건 체험해보고 구입할래.
최근 시들해지긴 했지만 분명 ‘포켓몬고’는 대단했다. 출퇴근길 지하철, 강남역 대로 할 것 없이 스마트폰으로 포켓몬고 게임에 열중한 ‘사냥꾼’들 덕분에 포켓몬고는 3주 만에 1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좀처럼
걷지 않던 사람도 바깥세상으로 끌어내는 이 게임은 현실과 가상을 오가며 진짜 사냥을 하는 것 같은 놀이의 쾌감과 묘한 성취감을 준다. 이처럼 놀잇거리가 필요한 소비자들을 잡기 위해 소비 시장도 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포켓몬고처럼 가상 경험을 하게 해주는 가상 피팅 서비스가 등장하는 한편, 기업들은 소비자들을 위한 체험 위주의 복합적인 볼거리 마케팅에 집중하고 있다. 계동 목욕탕을 개조해 쇼룸으로
꾸민 안경 브랜드 젠틀몬스터나 단순한 쇼핑의 개념을 넘어서 복합 문화 & 라이프스타일 공간을 구축한 신세계 스타필드하남 쇼핑몰이 좋은 예다.

덕후들의 마르지 않는 지갑 너의 팬이므로 아깝지 않아.
주변에 아이돌 그룹 샤이니와 관련한 머천다이저라면 부채부터 라면까지 뭐든지 사고 보는 ‘샤이니 덕후’가 있다. 그녀는 콘서트장에서만 파는 야광봉을 놓치자 몇 날 며칠간 인터넷 직거래를 뒤져 원래 가격의
10배에 가까운 금액인 12만원을 주고 기어코 그 물건을 손에 넣었다. 이렇듯 덕후들의 소비력은 대단하다.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서라면 금액에 상관없이 기꺼이 지갑을 열기 때문에 새로운 소비
주도 세력으로 주목받고 있다. 게다가 요즘 덕후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있어서는 전문가 못지않은 지식까지 갖추고 있어, SNS나 유튜브 같은 1인 매체를 활용해 자신의 덕력을 공유하는 인플루언서
역할까지 하고 있다.

1코노미, aka 혼족 혼자 놀려고 쇼핑해.
혼밥, 혼영, 혼술… 뭐든 혼자 하는 시대다. 과거에는 혼자 밥을 먹거나 영화를 보면 어딘가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치부하거나 궁상맞다, 청승맞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나 자신의 행복과 평안이
중요해진 현대인들은 이제 당당히 타인과의 관계를 최소화하고 혼자인 삶을 즐기기 시작했다. 잘나가는 TV 예능 프로그램 역시 죄다 혼자 사는 사람을 관찰하는 포맷이다. 이런 1인 가구 시대가 도래하면서
대한민국 라이프스타일 전반에 걸쳐 소비 패턴에 변화가 불고 있다.

백화점보다 편의점 동네가 편해, 나름 다 있다고.
‘내가 편의점에 갈 때마다 어떤 안심이 드는 건, 편의점에 감으로써 물건이 아니라 일상을 구매하게 된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비닐봉지를 흔들며 귀가할 때 나는 궁핍한 자취생도, 적적한 독거녀도
무엇도 아닌 평범한 소비자이자 서울 시민이 된다.’ 소설가 김애란의 단편 ‘나는 편의점에 간다’에 나오는 대목이다. 많게는 하루에도 여러 번 편의점에 들른다. 요즘 편의점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다.
철저하게 현대인들의 ‘편의’를 위해 진짜 필요한 게 뭔지 소비 패턴을 주시하는 일종의 소비 연구소다. 실제로 요즘 편의점에는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낮이나 밤이나 24시간 원하는 모든 순간 문이 열려있고
큰돈을 쓰지 않고도 소소한 소비의 즐거움을 주는 편의점은 백화점보다 매력적이다.

빌려 입고 빌려 쓰고 어차피 영원한 내 것이란 없단다.
19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출생한 밀레니엄 세대. 쉽게 말해 20대와 30대 초반을 포함하는 젊은 세대는 과거 세대와는 달리 명품 브랜드에 관심도 적고 소득 수준이 낮아 실질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소비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빌려 쓰고 나눠 쓰는 공유 소비의 개념이 각광받고 있다. 옷, 차, 아기 장난감 등 빌려 쓸 수 있는 품목도 다양하다. 실용적이고 편리하지만 무엇이든 일회용으로 끝나고,
오래도록 아껴 쓰고 물려줄 수 있는 ‘나만의 물건’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아재슈머 아저씨처럼 안 보이지?
아저씨를 이르는 ‘아재’와 컨슈머의 ‘슈머’를 합쳐 만든 단어다. 1990년대 문화를 주도해온 ‘X세대’, 지금의 40~50대들은 안정적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신에게 아낌없이 투자하며 쇼핑을 즐긴다. 침체된 소비
시장에 그나마 활력을 불어넣는 이들은 ‘큰손’이다. 중년의 나이에도 확고한 취향과 매력 있는 스타일을 일컫는 ‘아재파탈’이라는 신조어도 생겨나고 있는 상황. 구매력 있는 ‘아재슈머’를 겨냥해 기업들은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펼치고 있다. 현대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은 발 빠르게 맨즈 전용관을 오픈하고 매출이 크게 올랐으며, 롯데프리미엄아울렛은 BMW와 손잡고 세계 최초로 라이딩 카페를 열어 모터사이클과
각종 라이딩 장비를 전시하며 다양한 볼거리와 쇼핑아이템을 제공해 아재들을 흐뭇하게 했다. 소비의 가치를 알고 돈을 쓰는 어른이야말로 진짜 멋있는 법이다.

발품 대신 손품 이커머스 쇼핑의 고수가 진짜 쇼핑 고수라고.
“뭐 하러 무겁게 직접 장 보러 가요? ‘쓱(SSG)’ 하나면 되는데.” 그렇다. 스마트폰으로 출근길 주문한 물건이 퇴근할 때쯤이면 집 앞으로 배달되는 편리한 시대다. 힘들게 발품 팔 필요 없이 스마트폰으로 몇 번만
터치하면 최저가부터 차례로 쇼핑 품목이 뜬다. 비교도, 선택도, 결제도 빨라졌다. 한 친구는 지난 시즌에 찜해두고 못 산 코트를 끝끝내 이베이에서 찾아 지구 반대편에서 자기 옷장으로 소환한 일을 이야기하며
말했다. “찾으면 다 나와. 편리한 세상이야.” 이런 한국의 열혈 소비자들을 의식한 글로벌 이커머스 역시 수수료 등 여러 불편한 면들을 대거 개선했다. 디지털 콘텐츠에 익숙한 현대인의 쇼핑 스타일 덕분에
앞으로도 이커머스 시장은 더욱 활활 타오를 것이다.

 

참고 도서 <소비의 사회>( 문예출판사), <트렌드 코리아 2017>(미래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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