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DI SLIMANE, MY H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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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DI SLIMANE, MY HERO
에디 슬리먼의 디올옴므 마지막 컬렉션인 2007 F/W 시즌. © rexfeatures by alphaphoto
HEDI SLIMANE, MY HERO

Text Jong Hyun Lee

HEDI SLIMANE, MY HERO

나는 ‘대구’에서 25년여를 보냈다. 제아무리 ‘광역시’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어도 결국은 수도권 사람들에게는 ‘지방’으로 구분되는 대구에서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곳의 분위기는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곳 서울과는 많이 달랐다. 뚜렷하게 구분되는 정치색처럼 유년 시절 내가 겪은 유행도 수도권의 동갑내기들과 꽤 달랐다.
나는 아노락 점퍼에 힙합 바지를 매치하는 게 유행이었던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후부(FUBU)·엠엘비(MLB)·엔진(N’GENE)과 같은 스포츠 브랜드와 니(NII)·노튼(Noten)·디데이(D-Day)와 같은 캐주얼 브랜드에 캘빈 클라인의 생지 데님과 리바이스의 엔지니어드 진 그리고 나이키 맥스 90·95·97 시리즈를 신어야 함께 어울릴 수 있었던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는 박스 티셔츠로 대변되는 당시의 스트리트 패션과 할리우드 스타의 필수 아이템이었던 카고 팬츠가 유행했다. 그 시절의 유행은 어디서, 어떻게, 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게 유행이었기 때문에 나도 따랐지만, 남들과 똑같은 내 모습이 싫었다. 남들과 조금 달라 보이기 위해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스키니 진’을 입었다. 컬러는 자주색. “저게 스키니 진 카는 거 아이가?” 스키니 진을 입고 친구와 함께 동성로(대구의 가장 큰 번화가)를 걸으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다. 모두가 지금의 와이드 팬츠보다도 넓은 통의 바지를 입는 게 당연했던 그 시절의 대구에서 내가 입었던 스키니 진은 혁명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스키니 진을 패션 신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템으로 만든 에디 슬리먼과 그 시절의 디올 옴므가 혁명이었다.
어디서 흘러들어온 줄도 모르는 유행을 좇아가며 단지 ‘옷’만을 탐했던 내가 출처가 명확한 ‘패션’이라는 것에 빠져든 것은 바로 스키니 진을 입으며 에디 슬리먼과 디올 옴므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부터다. 웹사이트가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고 구글링이라는 것이 서툴렀던 당시 내가 패션을 접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하고 편리한 방법은 바로 잡지를 보는 것이었다. 일주일 용돈이 1만원에 불과했지만 각종 남성지를 매달 구독했고, <Gap Press>와 같은 값비싼 외지도 분기별로 구매했다. 새로운 잡지를 사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디올 옴므의 옷을 찾는 것이었다. 그렇게 두어 개 정도 나오는 디올 옴므의 옷은 반드시 스크랩했다.
그 시절, 최고의 디자이너가 누구냐에 대한 논쟁은 없었다. 에디 슬리먼이 유일했고, 에디 슬리먼의 패션이 모든 것인 시기에 나는 10대를 보냈다. 그의 생 로랑 시절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그의 디올 옴므 시절을 두고 논쟁하는 것은 그저 어리석음을 불러올 뿐이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에디 슬리먼의 디올 옴므는 그토록 강력했고, 강렬했으며, 오롯했다. 그렇다고 그가 단번에 최고의 반열에 오른 것은 아니다. 장 자크 피카르(Jean-Jaques Picart) 아래서 다른 디자이너들처럼 어시스턴트 기간을 거쳤고, 이후에는 이브 생 로랑의 남성복 디자이너로 혜성같이 등장하는 듯했지만 썩 성공적인 커리어는 얻지 못했다. 이브 생 로랑의 2000 F/W 시즌 Black Tie 컬렉션에서 그를 상징하는 스키니 실루엣이 첫 등장했다는 역사적인 의의가 있지만 이는 알렉산더 맥퀸의 지방시 시절처럼 다소 결과론적 찬사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디올 옴므는 달랐다. 이브 생 로랑의 연장선과 같은 데뷔 컬렉션을 지나 두 번째 컬렉션부터 적극적으로 스키니 실루엣을 도입하며 단번에 전설의 시작을 알렸다. 마니아층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Luster’ 컬렉션(2003 F/W)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스키니 실루엣이 전체 컬렉션을 뒤덮으며 바야흐로 ‘마름(Skinny)’ 시대를 알렸다. 디올 옴므는 전 세계 패션의 흐름을 바꾸었다. 타이는 얇은 직선이어야만 했고, 반드시 검정이어야 했다. 머플러는 한없이 길어야 했고, 바지는 꼭 골반에 걸쳐야 했다. 또 그 어떤 브랜드의 데님보다도 긴 기장을 자랑했던 디올 옴므의 스키니 진은 밑단에 생긴 주름의 숫자까지 헤아리며 이상적인 주름은 몇 개인가라는 토론을 벌이게 만들었다. 뒤 포켓의 바깥 부분 중앙을 가로지르는 직선의 스티치는 마르지엘라 이후 유일한 시그너처 스티치로 인정받으며 브랜드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로고가 되었다. 게다가 지금의 베트멍과 고샤 루브친스키가 그러하듯 디올 옴므도 의상뿐만 아니라 애티튜드를 유행시켰다. 남녀 할 것 없이 44 사이즈보다 더 마른 몸매를 가꾸기 시작했고, 그 흐름에 칼 라거펠트까지 동조하며 에디 슬리먼과 디올 옴므는 더욱 신격화될 수 있었다. 2007 S/S 시즌에 선보인 뱅 헤어와 비대칭 헤어는 기안84의 말마따나 패션을 위해 시각까지 포기하는 불편함을 감수하게 했다. 이토록 모든 것이 완벽했던 디올 옴므의 정점에서 에디 슬리먼은 2007 F/W 시즌을 끝으로 브랜드를 떠났다. 그리고 약 5년의 공백 후 자신이 수석 디자이너로 첫 커리어를 시작했던 이브 생 로랑으로 컴백하며 팬들의 오랜 염원에 보답했지만 그에 대한 지지는 디올 옴므 시절과 많이 달랐다. 우선 에디가 없애버린 ‘Yves’가 문제였다. 니콜라 포미체티와 크리스토퍼 데카르닌이 각각 티에리 뮈글러와 피에르 발맹에서 티에리와 피에르를 지워버렸을 때는 무심했던 비평가들이 에디 슬리먼이 생략해버린 Yves에 대해서는 그토록 말이 많았다. 명확한 이유는 없다. 이브 생 로랑과 가장 가까웠던 피에르 베르제가 승인했고, 고 이브 생 로랑이 싫어할 것이라는 비평가들의 주장에는 그 어떤 근거를 찾을 수가 없음에도 그들은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에디 슬리먼이 임기 말에 쿠튀르 고객을 위한 라인을 ‘이브 생 로랑’으로 명명하며 창립자의 이름을 더욱 특별하고 가치 있게 만들거라고는. 브랜드 이름에 대한 비판이 시들해지자 에디에 대한 비판은 그의 변함없는 주제인 록 무드로 이어졌다. 크리스토퍼 데카르닌이 발맹에서 전례 없는 펑크 록 시크로 브랜드를 탈바꿈시켰을 때는 혁신이었던 것이 에디 슬리먼의 생 로랑에서는 배신으로 불렸다.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선보이는 새로운 구찌는 그의 아이덴티티의 확립이지만 에디 슬리먼의 생 로랑은 오리지널리티의 부재였다. 칼 라거펠트가 찍은 샤넬의 캠페인은 재능의 발현이었으나 에디 슬리먼이 찍은 생 로랑의 캠페인은 재능의 맹신이었다. 그가 패션계에서 맹활약을 할 때나 잠시 패션계에서 떨어져 있을 때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것이 사진이었는데도 말이다.
갖은 논란 속에서 에디 슬리먼은 결국 생 로랑과 오랜 기간을 약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약 4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에디 슬리먼의 생 로랑은 매출을 2배나 늘렸고(케어링 그룹의 2015년 공식 발표 참고), 2015년에는 케어링 그룹 매출의 8.4%를 책임졌다(Bloomberg Intelligence의 2016년 발표 참고). 구찌가 프리다 지아니니를 대신하여 알레산드로 미켈레로 혁신을 꾀하고, 발렌시아가가 알렉산더 왕을 대신하여 뎀나 바잘리아를 영입해 이슈의 중심에 설 수 있는 브랜드로 전략화한 것도 에디 슬리먼의 성공 사례에 힘입은 덕분이다. 이는 에디 슬리먼이 고수익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두고 상업적이라고 비판하기 이전에 그가 많은 인기와 사랑을 얻었다는 사실의 반증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그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 나에게 에디 슬리먼은 아주 특별한 존재다. 에디 슬리먼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내가 지금 패션을 할 수있었을까? 디올 옴므가 없었더라면 10대 시절 내가 그토록 빠르게 패션에 빠져들 수 있었을까? 한 명의 디자이너가, 하나의 브랜드가 전 세계의 유행을 결집시키는 모습을 10대 시절에 보지 않았더라면 내가 과연 패션 산업에 환상을 품을 수 있었을까? 에디 슬리먼은 나의 삶을 바꿨다. 대구에서 아버지가 물려주신 가업을 이어받아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보다, 타지에서 매달 새로움을 위해 투쟁하고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해 논하는 것이 더 가치있는 일임을 깨닫게 해줬다.
얼마 전 샤넬은 10년간 이어진 오랜 루머(에디 슬리먼이 샤넬 옴므의디자이너로 임명될 것이라는)를 공식적으로 반박했다. 그의 복귀는 그렇게 또 무산되었지만, 언제나처럼 ‘록(Rock)’과 ‘젊음(Youth)’을 품은 채 다시 돌아올 순간을 기다린다. 늘 그의 편일 거고, “가장 확실한 것은 젊은 친구들이야말로 언제나 패션을 리드해나간다는 사실이다. 젊음엔 그런 인자가 있다”라는 10년도 더 된 그의 말을 여전히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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