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IT H

버려지는 것의 이름을 불러줄 때, 에르메스 쁘띠 아쉬.

Fashion PETIT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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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 Photography Ji Woong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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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멀리까지 넘어간 기억이 있다. 내 것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일상을 살아가는 아주 잠깐의 간격, 불현듯 지나온 길이 어제 일처럼 선명히 떠오를 때가 있다. 묘한 기시감 앞에 서면, 오래도록 당혹스럽고 서글프다.

<꿈꾸는 것처럼 잠들고 싶다>라는 영화가 있다. 일본 감독 하야시 가이조의 1986년 작품이다. 이 영화는 그의 장편 데뷔작이자 몽환적 필름 누아르 스타일과 무성영화에 대한 오마주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를 언제 봤는지, 줄거리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흑백필름으로 찍힌, 뿌옇게 산란하는 빛의 이미지만 선명하게 떠오를 뿐. 내게 그 이미지는 ‘아름답게’ 남았다.

겨울 아침, 서울 메종 에르메스 도산파크는 울창한 숲으로 변해 있었다. 그 풍경이 내게는 귀여운 잔상으로 남았다. 큰 창문에는 아름드리나무를 프린트한 시트지가 붙어 있고, 바닥에는 플라스틱 인조 잔디가 깔려 있다. 티 나지 않게 마음속으로 ‘에르메스 정도면 이 공간을 진짜 숲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며 킥킥거렸다. 그런데 사실 아무 상관없었다. 울창한 숲 사진 시트지로 도배된 창문을 통해 선명한 아침 햇살이 쏟아질 때 나는 그곳을 진짜 숲속 언저리쯤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숲에는 둥글고 큰 초록빛 눈동자의 중년 여성이 옅은 눈인사와 미소를 건네며 서 있었다. 에르메스 가문 6대 손이자 현재 에르메스를 이끌고 있는 악셀 뒤마의 외사촌 파스칼 뮈사르(Pascale Mussard) 여사다. 그 온화한 얼굴과 태도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날 그 공간에 머무른 아침의 기억 덕분에 정확히 언제 봤는지, 보기는 했는지조차 까마득한 하야시 가이조의 <꿈꾸는 것처럼 잠들고 싶다>를 떠올리게 됐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둘 사이에는 아무 연결 고리도 없다. 삶이란 원래 두서없는 일의 연속이 어이없게 쌓이는 걸 두고 보는 것 아닌가.

파스칼 뮈사르는 에르메스에서도 오랫동안 좀 낭만적인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쁘띠 아쉬(Petit h)’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 2010년부터 에르메스 공방에서 최고급 가방과 지갑 등의 제품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가죽과 비단, 크리스털이나 도자기 재료를 활용해 새로운 형태의 작품을 만든다. 처음엔 우려의 시선이 더 컸다. 오랜 시간 품위와 명성을 지켜온 기업의 입장에선 조심스러운 시도였다. 설득에 설득이 필요한 일이었다. 파스칼 뮈사르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쁘띠 아쉬’ 프로젝트를 통해 만든 오브제는 단순한 재활용이 아니다. 차라리 ‘오트 쿠튀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공방의 장인들은 그냥 버려질 뻔한 자투리 재료를 살피고 조합해 작품으로 거듭나게 한다. 그들의 순수한 열정은 어떤 면에서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모든 버려지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 말은 모든 버려지는 것은, 버려지지 않을 이유도 있기 마련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파스칼 뮈사르와 ‘쁘띠 아쉬’는 우리가 하찮게 생각하며 버리는 모든 것을 사려 깊은 시선과 손길로 관찰한다. 그는 정원사의 마음으로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 심은 풀이 작고 약하다고 해서 그대로 방치하면 죽게 마련이다. 대신 정성껏 돌보면 ‘아름드리나무 시트지’는 언젠가 진짜 아름드리나무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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