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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링과 네크리스, 링은 모두 피캐시디의 것, 퍼 코트와 빈티지 티셔츠, 데님 팬츠, 팬츠와 레이어링한 체크 스커트는 모두 스타일리스트의 것.
블랙 재킷은 더그레이티스트(The Greatest), 이어링과 네크리스는 피캐시디의 것, 슬리브리스 톱과 데님 팬츠, 벨트는 모두 스타일리스트의 것.
아가일체크 패턴 카디건은 푸시버튼(PushBUTTON), 레드 재킷과 데님 팬츠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파이톤 패턴 팬츠는 더그레이티스트(The Greatest), 이어링과 네크리스, 링은 모두 피캐시디의 것, 셔츠와 부츠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레이스 프릴 디테일 톱은 푸시버튼(PushBUTTON), 이어링과 네크리스, 링은 모두 피캐시디의 것, 스팽글 재킷과 슬리브리스 톱, 팬츠, 슈즈는 모두 스타일리스트의 것.
이어링과 그릴즈, 네크리스, 링은 모두 피캐시디의 것, 셔츠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이어링과 네크리스, 브레이슬릿, 링은 모두 피캐시디의 것, 슬리브리스 톱은 스타일리스트의 것.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뮤지션 피캐시디입니다. 예전에는 챙스타로 활동했습니다. 현재 써 드아이글로벌3YE Global이라는 레이블을 운영하고 있고, 최근에 바이스벌사라 는 아티스트의 음반을 제작했습니다. 코로나19 이전에 베가본즈 파티라고 클럽 파티도 여러 번 열었는데 4월부터 새로운 이름으로 파티를 열 예정이고, 브이로 그, 파티 영상 등 유튜브 콘텐츠도 다양하게 준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원래 뮤지션 ‘챙스타’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는데, 피캐시디로 바꾼 이유가 궁금해요.
일단 피캐시디로 넘어가려면 챙스타부터 살짝 얘기해야 하는데, 고등학교와 대 학교를 백인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미국 북동부에서 다녔어요.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다 보니 이데올로기에 많이 심취했죠. 그 이후 한국에 2015년 말쯤 들어왔어요. 그때만 해도 한국이 지금처럼 이렇게 자유분방 한 분위기는 아니었거든요. 기성세대가 우리 청년들을 n포세대, 달관세대라고 표현하면서 우리를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세대로 만들어버리는, 꼰대들이 장악 하고 있는 사회였어요. 그래서 미국에서 처음 왔을 때는 너무 답답했어요. 왜 이 렇게 남의 인생에 참견을 많이 하고 오지랖을 많이 부리고 사회가 정해진 대로 살아야 하고, 이래서 저희 리스너, 저희 세대 친구나 동료한테 우리 좀 더 자유롭게 살자, 하고 싶은 거 막 하자, 그때의 모토가 남한테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하고 싶은 거 꼴리는 대로 다 하자였어요. 피캐시디로 바꾼 이유는 5년간 챙스타 로 살다 보니 사회가 많이 바뀌고 제 자신도 많이 바뀌었어요. 한국 사회도 많이 개방적으로 진보하고 저도 한국 사회를 더 많이 이해하고 포용하게 되면서 뭔가 중간에서 만난 느낌. 챙스타로서의 역할은 다 한 것 같고, 내가 이 안에서 어떻 게 살 것인가를 많이 생각하다 보니 새로운 페르소나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티스트로서 보여주고 싶은 이 모든 게 사이키델릭이라는 하나의 장르에서 많이 오는 것 같거든요. 달라진 게 있다면 챙스타 때는 그동안 보아온 사이키델릭 문화의 비주얼과 엘리멘트를 그대로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면, 요즘에는 제가 겪어온 삶에 다른 것이 섞이기도 하고 그걸 저만의 색깔로 재해석한다는 게 굉 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지향하는 음악 장르나 하고 싶은 작업이 있다면.
장르를 딱히 정하지는 않아요. 챙스타 시절에는 이스트코스트에서 붐뱁을 즐겨 들으며 자랐고, 1960년대 사이키델릭 록을 좋아해 다 가미된 여러 장르가 섞인 음악을 했다면 이제는 좀더 자유롭게 그때그때 고친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음악을 만들고 싶고, 좀 더 유기적으로 커가면서 다양하게 작업하고 싶어요.
재해석한 사이키델릭.
닐 캐시디라는 인물이 있어요. 그는 1950년대 비트 문학, 비트 제너레이션 작가 들이 뮤즈로 삼았던 사람이에요. 그 책을 보면서 자란 친구들이 1960년대 들어 히피가 되었고, 그는 히피 컬처의 예수님 같은 상징적 인물이 되었죠. 옛날부터 항상 캐시디라는 사람을 존경해 와서 그 이름에 제 영어 이름 폴 챙Paul Chang 의 이니셜 ‘P’를 붙인 거예요. 저라는 사람이 근본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바뀐 것 이 아니라 피캐시디 안에 챙스타가 녹아 있는 거고, 피캐시디라는 사람이 아티 스트로서 자기만의 색깔을 더 잘 표현하고자 하는 거 같아요.
두 인물의 다른 점이라면.
예전에는 관념이나 법규나 이런 것 상관없이 ‘나는 와일드하고, 하고 싶은 거 다 한다’였다면 지금은 레이블도 하고 있고, 같이 도와주는 사람도 많다 보니 책임 감 안에 있는 자유. 책임감이 따르는 자유. 자유분방함보다는 좀 더 다듬어지고 여유로워진 것 같아요.
미국 명문대인 다트머스대학교를 나왔는데, 미국에 어떻게 가게 됐나요.
미국에서 태어난 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살았어요. 그러다 한국에서 중학교를 나오고 외고를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죠. 당시 해외 보딩 스쿨에 유학하는 것이 붐 이었는데, 저는 완전히 제 의지라기보다는 시대에 떠밀려 유학을 선택하게 됐어 요. 홍정욱이라는 국회의원이 <7막 7장>이라는 책을 냈을 때거든요. 그분이 초우트 로즈메리홀이라는 미국의 명문 고등학교를 나왔어요. 저희 부모님도 당시 다른 부모님처럼 제게 유학을 권하셔서 미국에 가게 된 거예요.
힙합 신에서 인맥이 상당히 넓은 편이에요. 인맥 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제 MBTI가 ENFP예요. 고등학교, 대학교 때부터도 유학생 사이에 많이 알려져 있었죠. 대학교 졸업 후 음악을 하겠다고 결심하고는 한국에 오면서 미리 오왼 이라는 뮤지션한테 연락을 해놨어요.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는데, 제가 ‘동 부 음악을 하는 걸 알고 있다. 멋있다. 한국에 오면 한번 만나자’ 얘기를 나누고 귀국 후 바로 만났죠. 오왼과 그때부터 친해져서 메킷레인 레이블 친구들도 알 게 되었어요. 그 이후 스윙스 형에게 ‘우리 회사가 커지고 있어서 영어랑 한국말 둘 다 잘하는 친구가 필요한데, 너 우리 회사에서 일 좀 도와줄 수 있냐’는 연락 을 받고 회화 통역 일을 하게 되었어요. 직원이라기보다는 친구처럼 블랙넛 형이랑 씨잼이랑 기리보이에게 영어를 가르쳤죠. 무엇보다 좋았던 건 많이 놀러 다니면서 어떤 아티스트를 만나면 ‘팬이에요’, ‘같이 사진 찍어요’ 이런 말은 절 대 안 하고 ‘나 누구인데 이제 유명해질 거고, 당신 음악 되게 좋아한다. 친구 하고 싶다’ 하면서 같이 놀았어요. 그러면서 빨리 친구가 된 것 같아요.
주로 사랑을 주제로 한 음악을 하는데, 피캐시디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사랑은 어려운데, 기적?! 최근에 짝사랑을 했는데 평소 연애에 어려움을 느끼는 스타일은 아니어서 10대, 20대 때도 짝사랑은 거의 해보지 않았어요.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 같은 관계였는데 장애물 같은 상황이 있었고 그걸 푸시하다가 오 히려 그분에게 상처가 될 수 있어 놓아주었죠. 사랑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 는데 사랑은 내가 원한다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운명의 상대가 나타나는 것도 자주 일어나지 않는 일이고, 또 나타났더라도 그 사람과 나와의 타이밍이 맞아야 하고, 서로 마음이 있어야 하는 등 너무 많은 변수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랑은 기적인 것 같아요.
앞으로의 계획은.
일단 3월 말에 싱글앨범이 나오고, 사랑을 주제로 만들고 있는 앨범이 아마 여름 안에 나올 것 같아요. 피캐시디라는 이름을 많은 사람이 알 수 있게, 또 새로운 사람에게 인식될 수 있게 음악을 많이 선보이려 하고, 예전 팬과 새로운 팬들이 좀 친해지는 단계라고 생각해 얼굴을 최대한 많이 비치려고 합니다.
Editor Kim sungjae
Fashion Ahn doohyun
Photography Lee Yunkyun
Art Koo Hyemi, Spino
Hair & Makeup Lee seo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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