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의 도시 제네바는 무슨 세상의 끝에서 제멋대로 시간을 조정하듯 저 멀리, 다른 시간 속에 있는 듯 그랬다.

매시 매분 매초

CARTIER
100년이 훌쩍 넘도록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클래식을 클래식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까르띠에 탱크의 손목을 붙잡고 다짜고짜 묻고 싶어진다. 탱크는 올해 프리베 컬렉션을 통해 오리지널 탱크 노말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했다. 그러니까 이건 1970년대에 바치는 어떤 경의 혹은 진보. 한편, 클래쉬 언리미티드 워치는 또 다른 방식으로 길을 개척하며 자신을 드러낸다. 가지각색 서로 다른 소재와 모양을 한데 모았는데 앗, 이것들이 따로 노는 대신 한 몸이 되어 부드럽게 옥죄듯 손목을 잡고 놔주질 않네.

ROGER DUBUIS
요란하게 베일을 벗은 모노볼텍스™ 스플릿 세컨즈 크로노그래프의 새빨간 자신감을 만끽하는 일은 어딘지 모르게 통쾌했다. ‘우리의 게임에 규칙은 없다’고 외치는 브랜드의 유아독존 정체성을 대변하는 총아라 할 법하다. 정해진 규칙을 싫어하는 로저드뷔는 스플릿 세컨즈 크로노그래프와 투르비용의 창의적 결합을 시도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각종 불가능의 선을 기어이 넘어섰다고 이해하면 쉽다. 로저드뷔는 겸손은 사양, 드러내기 위한 시계다. 슈퍼카의 대시보드를 손목에 떡하니 올리고 다니는 일. 그런 모양에 그런 가격.

JAEGER-LECOULTRE
2023년 예거 르쿨트르의 테마는 1.618로 정의되는 ‘황금 비율’이다. 예거 르쿨트르는 ‘사각사각’한 얼굴의 리베르소야말로 황금 비율의 원칙에 딱 부합하는 컬렉션이라 주장한다. 라틴어로 ‘뒤집다’, 스페인어로 ‘뒷면’을 뜻하는, 자칫 얌전해 보이는 전통의 강자는 말 그대로 동전 뒤집듯 뒤집히는 케이스 구조를 장착한 두 얼굴을 가졌다. 차라리 전혀 다른 두 시계라 하는 편이 정확할지 모른다. 쓱 밀어 툭 하면 금세 다른 세계, 다른 시계가 펼쳐지니까.


VAN CLEEF & ARPELS
‘시간을 알려주는 주얼리’라는 문장이 주는 로맨틱한 감상에 빠져 있자니 지금이 몇 시 몇 분인지 그런 건 다 무의미해진다. 반클리프 아펠의 루도 시크릿 컬렉션은 1934년 메종 설립자 중 한 명인 루이 아펠의 아명을 바탕으로 한다. 각종 진귀한 보석이 알알이 박힌 루도는 마음먹기에 따라 시계의 문을 여닫을 수 있다. 시간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도, 아니면 영원히 활짝 열어젖히는 것도, 결정은 당신이 아닌 내 몫이다.

HERMÈS
1978년 에르메스의 앙리 도리니가 탄생시킨 아쏘 시계는 메종 특유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아쏘 쁘띠 룬’은 70개의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화이트 골드 케이스에 오팔로 빚은 신비한 우주를 담아낸다. 행성은 시시각각 은은한 빛을 발하고, 저 멀리 촘촘히 박힌 밤하늘의 별도 이따금 반짝인다. 에르메스 하면 또 가죽! 블루 사파이어 악어가죽 스트랩이 손목 위로 소행성을 품는 순간. 하루를 마치며 달의 표정을 내려다보는 일. 올려다보는 건 이제 그만.

MONTBLANC
제네바에 머문 내내 창밖 저 멀리에 설산 하나가 솟아 있었다. 그게 그냥 동네 뒷산인지, 아니면 그 유명한 알프스 어디쯤인지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겨놓은 채. 새로운 몽블랑 8000캡슐 컬렉션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14개 봉우리를 조명한다. 해발 8000m가 넘는 산을 기준으로 했다. 이 산들은 산소가 충분하지 않아 사람이 생리학적으로 몇 시간 이상 생존하기 어렵기 때문에 오르기 까다롭고 위험하기로 악명 높다. 정확한 시간을 말하는 시계가 필수다. 아, 탐험가의 시계는 단순히 지금이 몇 시인지, 약속 시간에 늦지 않았는지를 확인하는 것과 다른 차원의 시간을 말하는구나. 잠깐 좀 멍하니 서 있었다.

TUDER
튜더는 롤렉스 창업자 한스 빌스도르프가 좋은 품질과 합리적인 가격 둘 다를 만끽하기 위해 만들었다. 오이스터 케이스와 셀프와인딩 퍼페추얼 로터 메커니즘으로 알려진 롤렉스의 상징을 전수받긴 했지만, 여전히 ‘롤렉스의 동생’ 운운하는 세간의 간섭은 영 치사하다. 튜더는 머무는 대신 과감한 도전과 시도를 거듭하며 더 젊고 더 용감한 길을 스스로 개척해 왔다. 값비싼 시계를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거나 습관적으로 팔을 들어 올려 과시하는 사람은 별로다. 편하게 쿨하게 멋지게 매일 튜더 블랙 베이를 차는 사람과 사랑에 빠질지어다.


IWC SCHAFFHAUSEN
인제니어가 돌아왔다. 2017년 최초의 인제니어 Ref. 666 디자인으로 라인업을 재단장한 지 약 6년 만의 귀환이다. 워치스앤원더스에서 새롭게 선보인 IWC 뉴 인제니어 40은 제랄드 젠타의 디자인을 충실하고 세련되게 계승했다. 브레이슬릿은 살짝 좁아졌고, 케이스 링의 곡선은 시계 본체가 잘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조력한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역시 베젤이다. 원래 다섯 개의 핀으로 고정된 홈 구성의 베젤이었는데, 다각형 나사가 베젤을 케이스 링에 고정하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일관된 대칭 형태로 거듭났다. 디테일의 차이가 자아내는 진폭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크고 넓게 드러나는 법.

CHANEL
하우스의 창립자 가브리엘 샤넬은 생전 자신의 별자리인 사자자리를 비롯해 우주와 혜성 등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올해 샤넬 워치는 하우스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항성과 항성 사이를 말하는 ‘인터스텔라’라는 믿음 아래 광활한 우주의 시간으로 향한다. 거기에 머문다. 샤넬 워치의 클래식이라 할 만한 J12는 쪼개지듯 견고하게 이어지는 픽셀 모티브와 별이 빛나는 밤처럼 눈부신 행성 모티브, 우주선과 우주인 등 우주의 상징과 별자리를 수놓은 채 다시 태어났다.

PIAGET
눈이 부시다 못해 멀어버릴 것 같은 시간도 있기 마련이다. 피아제의 하이 워치 메이킹 기술은 하이 주얼리 기술을 바탕으로
1957년부터 눈부신 활약을 펼쳐왔다. 보석을 패브릭처럼 부드럽게 연마하고 미세하게 조각해 빛을 품거나 내뿜는 섬세한 기술은 기술이지만 동시에 진귀한 예술이다.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선 담대한 카리스마. 적어도 피아제에 시간은 금이 아니라 신비한 에너지를 내뿜는 찬란한 빛이다.

Text & Photography Choi Jiwoong
Art Koo Hy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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