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중 가장 이름 같은 이름은?

너울(은) 이제(는) 서련(이) 소호(가)

Text Kwon Sohee

학교 다닐 적, 중앙도서관 811번에서 이소호라는 이름을 처음 봤다. 반갑다.
시인으로 2014년도에 데뷔했고, 요즘에는 산문을 비롯해 소설도 쓰고 있는 이소호라고 한다.

시인에게는 두 가지 이름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경진과 소호. 어떻게 소호가 됐나.
원래 ‘등단하면 필명을 써야지’ 하는 생각이 있었다. 과거 이름이 경진인데, 검 색도 잘 안 됐으니까. 경진이라는 이름으로 투고했는데 계속 떨어지는 바람에 개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작명소에 갔는데, 너무 평범한 이름만 주더라. 주변 친구들에게 이름을 받아 이를 엑셀로 취합해 투표했다. 그중에 두세 개 를 골라 작명소에 가서 가장 괜찮다는 이름으로 정한 게 ‘소호’다. 굉장히 민주적이면서도 종교적이지.(웃음)

소호라는 이름에는 무슨 뜻이 있는가.
‘소금 소䴛’에 ‘좋을 호好’를 쓴다. 소금처럼 좋은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조금 기독교적인 것 같기도 하고. 이름이 특이하긴 하다.

여러 에피소드가 있을 것 같은데, 당장은 뉴욕의 소호 거리가 떠오른다.
맞다. 뉴욕에 있었을 때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주문하는데, 이름이 ‘소호’라고 하면 다들 안 믿었다. 영어 못하는 외국인인 줄 알고, 이름 대신 지명을 말했다고 생각하더라.(웃음)

서울 스타벅스에서 외국인이 “서울입니다” 하는 것 같네. 소호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시기에 마침 등단했다고 들었다. 운명처럼 느껴졌겠다.
약 4년간 투고했는데, 운명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사실 과거 이름인 경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흔해서. 이소라의 노래 ‘Track 9’ 중에 이런 가사가 있다.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났고 / 내가 짓지도 않은 이 이 름으로 불렸네” 그 가사에 정말 많이 공감했다. 내가 지은 내 이름으로 살아볼 권리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

“‘시 쓰는 이소호’가 되기 위해 마지막으로 부모 님이 정해주신 ‘이경진’이라는 이름까지도 버렸다.” 계속 ‘버린다’라는 표현을 쓰 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글은 써놓고 지우면서 완성되는 것 같다. 그런 삭제가 내겐 성장 같다. 글의 완성도는 삭제에서 나오는 것처럼, 아마 나는 이름을 삭제하며 성장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소호 시인의 시에서는 경진이라는 이름이 꽤 자주 보인다.
내 시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화자가 ‘나’와 ‘너’인데, 사실 모두 ‘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조금 특별하게 화자를 지칭하고 싶었다. 경진이 ‘나’이면서 ‘내가 아닌 다수’가 될 수 있는 이름이 될 수 있겠다고 느꼈다. 많은 사람이 시 속 경진을 통해 자연스레 경진이라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도 갖고, 결국 경진이 나의 과거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 좋다. ‘경진’이 내 시를 다양하게 느낄 수 있는 발판이 되었으면 한다.

경진이라는 이름을 썼을 때야 가능한 이야기들이 있을 것 같다.
맞다. 일종의 부캐다.(웃음) 경진이라는 이름으로 아픈 일들을 주로 써서 그런지 사람들은 내가 시를 쓰면 무척 슬플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사실 해방감을 많이 느낀다. 가수가 슬픈 노래를 부르며 무대 위에서 다 토해냈을 때의 해방감과 비슷하다.

 

심너울 작가의 SF가 내게는 파도와 같은 사건으로 느껴졌다. 나같이 장르문학에 익숙지 않은 사람에게도 쉽고, 시원시원 읽혀 놀랐다. 왜 SF를 선택했나?
부끄러움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의 인생을 내가 글로 쓴다는 것 자체를 민망하고 부끄럽게 생각한다. 이전에 공유경제에 관한 리포트를 읽고 이를 소재로 해 소설을 쓴 적이 있는데, 배달이나 택시와 같이 공유경제와 관련한 노동을 해본 경험이 없으니 내가 왜곡할까 싶어 쓰면서도 조금 부끄럽더라. 그럴 때 장르적인 도구를 쓰는 편이다. 또 사회적인 이야기를 쓰는 데에는 SF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점에서인가.
우리 삶과는 더 이상 떼어놓을 수 없는 게 과학기술이니까. 그런 점에서 기술과 인간 간의 갈등을 쓰는 걸 좋아한다.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욕망을 기술이 만들고 있지 않나.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스마트폰이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필요한 줄 모르고 있었는데, 스티브 잡스가 그런 욕망을 개발한 거라고 생각한다. 기술은 계속 발달하고, 또 그런 식으로 우리의 욕망도 계속 새로 확장되겠지. 그런 지점에서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추잡스러워질 수 있는지도 탐구해 보고 싶다. 

그런 와중에 작가의 작품 속 캐릭터들은 인간적인 면도 지니고 있다. 툭툭 그게 튀어나와 재밌었다.
사실 우리가 “알면 사랑한다”라고 하는 것처럼, 알면 욕할 수 없다. 개인의 욕망이라는 것도 알면 나름의 사정이 있고 서사가 있기 마련이니까. 결국 내가 쓰고 싶은 건 개인이 가진 욕망과 거기서 비롯된 결과가 나쁘거나 잘못됐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구조적인 문제들이 기저에 있음을 더 드러내고 싶어하는 것 같다. 

작가로서 데뷔하고, 이름에 부여한 의미가 또 있을까.
대학 다닐 때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한때는 소위 ‘히키코모리’라고 하는 생활도 6개월가량 했는데, 그 생활을 좀 끝내보겠다는 생각으로 개명을 했었다. 그래서 심너울이라는 이름은 내게 하나의 의식과도 같다.

“심너울”이라는 석 자가 어떻게 기억됐으면 좋겠나.
큰 기대는 없다. 이름을 남길 정도로 위대한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도 없다. 그냥 바란다면 1000명의 고정 독자 정도. 최근에 작법을 연재 중인데, 작법이라는 게 보는 사람도 있지만 굳이 찾아보는 사람이 많다고는 할 수 없지 않나. 그런데 그런 작법까지, 꾸준히 내 글을 읽고 후원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왜 읽는지 물어봤더니 그냥 작가님이 쓴 거니까 읽어봤다고 그러더라. 뭘 쓰든 따라와 주는 1000명이면 글을 쓰면서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다.

중요한 문제다. 
그 정도만 돼도.. 이 시장 안에서 거대한, 거목 같은 작가들이 있다면 나는 그 나무들 어딘가에서 자라는 버섯이 아닐까 생각한다. 누군가는 나무 사진을 찍겠지만, 또 가끔 버섯 사진도 찍는 누군가가 있겠지. 그걸로 버섯찌개를 해 먹을 수도 있고.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이지?(웃음) 

반가운 이름이다. 자기소개 부탁한다.
영화를 전공했고, 소설을 쓰고 있다. <0%를 향하여>라는 소설집을 출간했고, 올해 다음 소설집과 장편소설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그리고?
뭘 더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 최근에 해외 축구를 보기 시작했고, 방방을 탔는데 재밌었다.

해외 축구는 이번에 보기 시작했나?
전에도 간혹 보긴 했는데, 이제 매주 챙겨 보고 있다.

책을 읽을 때는 몰랐는데 서이제라는 이름이 필명이더라.
‘이제부터 다시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이제’라고 이름을 지었고, 이제라는 이름으로 투고했을 때 딱 당선이 됐다. 그래서 그 이름을 필명으로 삼게 됐다.

혹시 본명이 뭔지 물어봐도 될까.
서민희다.(웃음)

무척 다른 느낌이다.
늘 중성적인 이름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민희라고 하면 좀 조용하고, 차분하고, 여성스러운 느낌이 드는데 그 이름에 내가 갇히는 것 같았다. 활발하게 하거나, 장난을 치거나, 나쁜 짓을 못 하겠더라. 그래서 어릴 적부터 언젠가 내 이름을 직접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이제’라는 이름, 그리고 그 어감에 대해 곰곰 생각해 봤다. 그러다 떠올린 것은 이제라는 말의 속성이 앞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문득 그 모습이 서이제의 소설과 꼭 닮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가.
아마 내 소설에 걷는 장면이 자주 나와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실제로 문장을 쓸 때 ‘앞으로 나아간다’라는 생각을 하고 쓴다. 빨리 걷거나, 느리게 걷거나, 산책한다, 배회한다는 느낌으로. 발자국을 남기는 것처럼 흰 페이지에 텍스트를 남긴다고 생각한다.

역시나. 서이제의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가 끝을 굳이 정해 두지 않고, 다만 계속 쓰고 있다는 인상이 든다. 어떨 땐 정말 하릴없어 보일 정도로.
그 말이 반갑다. 정말 그렇게 쓰거든. 되도록 계획 없이 쓰려고 노력한다. 영화 공부할 때는 처음과 끝을 명확하게 두고 쓰게끔 교육받는다. 그래서 소설을 쓰면서는 정말 산책하듯, 어디로 갈지 모르겠지만 어딘가에 닿겠지라는 마음으로 쓰는 게 가능하구나를 알았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내가 많이 변할 수 있다고 느꼈고. 그게 내게는 무척 좋은 문학적 체험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시나리오 쓸 때와는 다르게 ‘끝도 시작도 없이 읽히는 소설을 써보자’ 하는 마음으로 무작정 쓴다. 개인적으로 책의 물성과 스트리밍 타임바의 속성이 닮았다고 생각하는 데, 책을 보통은 앞에서부터 읽지만 얼마든지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뒤죽박죽 읽는 방법도 있지 않나. 그런 방식으로 시간을 재배치하는 일도 굉장히 재밌고. 나는 영화도 종종 결말부터 본다. 결말보다는 결말이 왜 이렇게 되는지 조합하면서 보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가끔 공부를 위해 봐야 하는 영화들은 10분 단 위로 쪼개서 본 적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까 시간의 개념이라는 게 내게는 조금 자유롭다. 무한하고, 뒤죽박죽이고.

계획대로 쓰는 사람은 확실히 아닌 것 같다.
계획을 세워서 계획대로 되면 모두 좋다. 그 계획을 지켰으니 내가 썩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난 그것보다 더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인데, 계획과 같은 한계에 나를 가두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살다 보면 예상치도 못한 일이 너무 많지 않나. 소설을 쓸 때 한 문단을 쓰고 다음 날 어딘가를 돌아다니다 보면 여러 일들이 발생하는데, 나는 그걸 보면서 자연스럽게 다음 문단을 떠올리고 쓰게 된다. 우연히 어떤 사람이 지나간다거나, 우연히 버스를 놓치거나 하는 일들. 그렇게 우연과 협력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면 매일이 너무 즐겁고, 삶이 좀 깔끔해진다. 어디로 가든 소설로 모두 정리가 되는 하루니까.

우연과 협력한다니, 너무 좋다.
그래서 내 소설을 보면 가끔은 내게만 보이는 일기 같다. 이걸 썼을 때 언제 적 여름이었고 하는 걸 떠올린다. 나만 볼 수 있는 풍경이나 이야기들, 그 맥락들이 있어 좋다.

'서이제’라는 석 자가 어떻게 기억됐으면 좋겠나.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데 이런 질문을 받게 되어 기쁘다. 나중에는 귀엽고 재밌는 할머니를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이 됐으면 좋겠다. 또 나는 소설을 쓰니까, 서사는 무언가 변하는 걸 다루니까 계속 변화하면서 재밌게 꾸려갈 수 있는 이름이길 바란다. 

서정적인 이름이다. 서련 작가에게 새벽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새벽에 많이 깨어 있고, 글도 쓴다.(웃음) 10대 때 이야기이긴 한데, 그때 만나던 친구가 푸른 새벽이라는 가수를 좋아해내 이름의 뜻을 알려준 적 있다. 그러니 어느새벽에 “새벽이 오고 있어. 너를 안아줄 수 있어서 기쁘다” 이런 문자를 보내더라. 별로 안 좋게 헤어졌는데(웃음) 그 기억은 오래간다.

<체공녀 강주룡>부터 어떤 여성들의 이름을 계속 호명하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이름은 부르는 일부터 의미 있지 않나.
맞다. 나도 눈치채지 못한 부분인데, 알게 모르게 이름이나 대명사에 조금 집착 하는 경향이 있더라. 첫 장편소설 <체공녀 강주룡>부터 <마르타의 일>, <더 셜리클럽>까지 연달아 낸 책 세 권의 제목에 모두 사람 이름을 넣기도 했고.

필명을 쓸 생각는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나.
첫 책을 낼 때까지만 해도 필명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첫 책을 내고 나서 필명인지 묻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 전까지는 필명을 사용하는 걸 고려해 본 적도 없었는데 필명이냐는 질문을 받고 나서야 왜 필명을 지어 볼 생각을 안 했을까 생각을 해봤다. 그런데 내 이름을 짓는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것 같더라.

왜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나?
욕심이 너무 많기 때문이겠지. 아마 나의 이름을 지은 우리 아버지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될 줄 모르고, 내가 새벽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지었을 테다. ‘아름다울 련’이 순종하다라는 의미도 들어 있다고 하더라. 그런 식으로 나름의 소망,바람도 들어갔을 거고. 지금의 나 역시 원하는 자아상을 갖고 있다. 보다 성실하고 유능해지고 싶고, 키가 지금보다 컸으면 좋겠고, 살이 조금 빠졌으면 좋겠고 하는 자아상. 이름을 짓는다면 그런 마음을 반영해서 지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되려면 이름이 한 스무자 정도 되지 않을까.(웃음)

작가로 데뷔하고, 자신의 이름에 부여한 또 다른 의미가 있을까.
사실 작가가 되기 전에는 지금보다 더 ‘관종’이었다. 나를 알아봐 주길 하는 욕구가 무척 강했다. 그런데 그런 욕구가 작가가 된 이후로 많이 사그라들어서, 이름을 덜 찾아보게 되고 덜 생각하게 된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름의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인 것 같다. 나의 특별함, 내이름의 특별함을 사람들에게 더 이상 호소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Editor Kwon So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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